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시노 센이치 (문단 편집) === 선수로 [[콩라인]]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livedoor.blogimg.jp/e8c90d7e.jpg|width=100%]]}}}|| || {{{#fff '''현역 시절의 호시노 센이치'''}}} || 데뷔 첫 해부터 주니치의 주전 투수로 자리잡은 호시노는 [[선발 투수]]와 [[중무리 투수]]를 오가며 맹활약했고, 1974년엔 49경기 17선발, 188이닝 133탈삼진, 15승 9패 '''10세이브''' ERA 2.87의 맹활약으로 [[주니치 드래곤즈]]의 20년 만의 [[센트럴리그]] 우승 달성에 공헌하며 '''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10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고'''[* 당시 요미우리는 1965-73시즌까지 9년 연속으로 '''[[센트럴리그]]-[[일본시리즈]]를 연패해낸''' 야구 역사상 다시 나오기 힘들 최강의 팀으로 이 시기를 일명 '''V9'''이라 부른다. 10년 연속 우승이 좌절된 1974년 시즌 종료 후 V9의 감독인 [[카와카미 테츠하루]]가 사임함과 동시에 [[오 사다하루]]와 함께 V9시대의 주축 거포로 활약했던 [[나가시마 시게오]]가 은퇴하고 감독으로 전임하게 되며 전설의 V9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.]해냈고, [[센트럴리그]] 최초의 세이브왕과 [[사와무라상]]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.[* 세이브가 엄청 적어서 저 성적으로 어떻게 수상했는 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, 당시의 [[마무리 투수]]를 비롯한 구원투수들은 요즘처럼 1이닝만 던지는 게 아니라 만약 선발이 [[완투]]를 하지 못한 채 강판되면 그 남은 이닝을 책임지기 위해 2~3이닝씩 던지는 [[중무리 투수]]에 가까웠기 때문에 세이브가 성립될 상황에서 등판할 경우가 적어서 그만큼 현대의 전문 마무리에 비해 세이브 수가 현저히 적었다.] 그러나 '''[[일본시리즈]]에서는 [[롯데 오리온즈]](現 [[치바 롯데 마린즈]])에게 2승 4패로 패배.'''[* 당시 [[롯데 오리온즈]] 감독은 공교롭게도 '''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OB이자 [[영구 결번/스포츠|영구 결번]] No.34''' [[가네다 마사이치]]였다. 참고로 가네다의 투수 통산 400승 겸 마지막 우승도 [[주니치 드래곤즈]]를 상대로 이뤄낸 것이다.(1969년 10월 10일) '''거기다 그날 패전투수가 바로 다름아닌 [[호시노 센이치]]였다(...)'''][* 또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이 다름아닌 드래곤즈의 홈구장이었던 [[나고야 구장]]에서 열렸다. 주니치에겐 이만한 굴욕도 없을 듯. 게다가 호시노는 패배가 결정된 6차전에서 7회부터 구원등판했다가 연장 10회에서 '''3루 희생타 - 2루타'''를 연달아 얻어맞고 결승점을 내주면서 패전투수가 되는 바람에 주니치를 패배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(...) 참고로 6차전 이전에도 1~2차전 2번 연속으로 구원등판해 1차전 승리투수, 2차전 패전투수가 되었던 상황이었다.] 하지만 주니치의 팬들은 그때까지 경쟁자가 없었던 [[교진군]]의 V10을 저지한 이 [[1974년]]을 엄청 좋아한다.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1974년 [[다이요 훼일즈]]와의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이 양반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뒤 모자를 거칠게 벗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지금도 1년에 최소 한 번씩 [[나고야]] 지역 민방에서 볼 수 있다. 팀이 이겨서 그런지, [[교진군]]을 발라서 그런지... ~~사실은 둘다.~~ 그 후로도 주니치의 간판 투수로 활약했으나, 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의 전성기 대두와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부활, [[야쿠르트 스왈로즈]]의 [[갑툭튀]] 등등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. 1982년에는 시즌 막판 [[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]]와의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, 이기면 [[주니치 드래곤즈]]가 리그 우승을 하고, 지면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가 리그 우승을 하는 상황이었다. 그리고 주니치의 에이스 [[코마츠 타츠오]]가 [[완봉승]]으로 활약하여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'''일본시리즈에서 [[세이부 라이온즈]] 에게 2승 4패로 패했고''',[* 공교롭게도 이때 세이부 감독도 '''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OB'''인 [[히로오카 타츠로]]였다. 참고로 히로오카는 1978년 야쿠르트의 첫 일본제일을 이룬 감독이기도 하다.][* 이 해 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인 6차전도 [[나고야 구장]]에서 열렸다. 또 공교롭게도 당시 세이부의 주전엔 '''다름아닌 그의 대학 시절 라이벌이자 친구인''' [[타부치 코이치]]가 있었다.] 호시노는 그 해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. 통산 성적은 '''146승 121패 34세이브, [[평균자책점]] 3.60, 1225탈삼진.''' 불과 14시즌(1969~1982)밖에 뛰지 못했고, 시즌 당 평균 승수도 10.6승에 불과하였으나 거인전에서만 무려 '''35승'''을 챙겼다.[* 한편 패전의 1/3 가량을 차지하는 31패도 거인전에서 쌓았는데, 보다시피 거인전 승률이 5할을 넘는다. 호시노가 데뷔했을 당시의 요미우리가 [[왕조(스포츠)|한창 V9를 찍고 있던 원탑 초강팀]]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요미우리 킬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.] 신인시절에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 이후 변화구를 주로 던지며 기교파 투수로 변모했고, [[구원투수]]와 [[선발투수]]를 겸업하며 마구잡이식으로 등판하면서 거둔 성적이라서 드러난 성적에 비해 훨씬 더 팀 공헌도는 높았다고 평가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